장기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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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기(張旣)는 후한 말기, 조위 시대의 인물로, 관중 평정 및 옹주와 양주 자사를 역임하며 활약했다. 원소 사후 조조를 돕기 위해 마등을 설득하여 군사를 지원받고, 고간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군사적 공을 세웠다. 이후 경조윤, 상서, 옹주자사를 거쳐 양주자사로 이민족을 토벌하고 서향후에 봉해졌다. 황초 4년에 사망했으며, 조예 시대에 숙후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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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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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기 |
로마자 표기 | Jang Gi |
자(字) | 덕용(德容) |
시호 | 숙후(肅侯) |
생애 | |
출생 | 불명 |
출생지 | 사례(司隸) 좌풍익(左馮翊) 고릉현(高陵県) |
사망 | 223년 |
사망지 | 불명 |
관직 | |
소속 세력 | 조위(曹魏) |
주요 관직 | 경조윤(京兆尹)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주자사(涼州刺史) |
작위 | 서향후(西鄉侯) |
가족 관계 | |
자녀 | 장기(경중)(張緝) 장옹귀(張翁歸) |
2. 생애
장집(張緝)의 아버지이며, 조애(曹叡)의 부인 장황후(張皇后)의 할아버지였다.
16세에 군의 소속 관리가 되었다. 공조(功曹) 서영(徐英)에게 스스로 30회 정도 매를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1]
이후 군의 고관을 역임했고, 효렴으로 추천되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사공이 된 조조로부터 사공부(司空府)에 초청받았지만, 부임하기 전에 무재로 신풍(新豐) 현령에 임명되었다. 그 치적은 삼보에서 제일이었다고 한다.
건안 13년(208년), 조조는 형주 정벌을 생각했지만, 관중에 할거하는 마등의 동향이 신경 쓰였다. 장기는 조조의 명으로 마등에게 사자로 파견되어, 군대를 해산하고 귀향하라는 조조의 명령을 전했다. 그러나 마등이 귀향을 좀처럼 실행하지 않자, 장기는 변고가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여러 현에 병량을 비축하게 하는 한편, 군 태수들에게 교외까지 마중나가게 했다. 마등은 아들 마초에게 군세를 맡기고 동쪽으로 향했고, 조정에 귀순했다. 조조는 상주하여 마등을 위위로, 마초를 장군으로 삼았다.
후한의 번국으로서 위나라가 성립되자 상서가 되었고, 곧 지방으로 나가 고향인 옹주자사가 되었다. 장로 토벌에서는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저족을 토벌하여, 보리를 수확하여 병량으로 삼았다. 장로가 항복하자, 한중의 수만 호를 이주시켜, 장안과 삼보의 인구를 보충하도록 조조에게 진언했다.
건안 23년(218년), 조홍과 함께 하변으로 가서, 유비군의 오란을 격퇴했다. 또한 하후연을 따라 송건 토벌을 했을 때는, 별군을 이끌고 임조와 적도를 공격하여 공적을 세웠다.
이전, 조조가 이민으로 하북의 인구를 보충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농서, 천수, 남안의 3군은 동요하고 있었다. 장기는 3군 출신의 관리와 장교에게 휴가를 주고, 집을 수리하게 하고 물방아를 지급했다. 이 때문에 민심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조조는 한중에서 철병할 것을 생각했지만, 유비가 무도의 저족을 아군으로 삼아, 관중에 압력을 가해올 것을 걱정하여, 장기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질문했다. 장기는 "저족을 북방으로 이주시켜, 유비로부터 피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조조는 이에 따라 장기에게 명하여, 무도의 5만 명의 저족 부락을 부풍·천수에 거주하게 했다.
서역의 무위, 장액, 주천, 서평의 4군에는 각각 유력자들이 할거하여, 자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무위의 안준(顔俊)이 조조에게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고, 귀순과 원조를 요청해왔다. 장기는 그들의 내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진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준이 장액의 화란(和鸞)에게 살해되고, 장액과 무위의 유력자들 간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건안 25년(220년)에 조비(문제)가 왕위에 오르고, 양주가 다시 설치되자, 안정 태수 추기(鄒岐)를 자사로 임명했지만, 4군의 유력자들은 이에 따르려 하지 않았고, 임명된 군 태수를 추방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장기는 소칙과 협력하여, 공적을 세웠다. 도향후에 봉해졌다.
양주에서 이건기첩(伊健妓妾)·치원다(治元多) 등의 반란이 일어나자, 조비는 "장기가 아니면 이민족으로 혼란스러운 양주를 다스릴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장기를 양주 자사로 임명하여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장기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이건기첩·치원다 등을 토벌했다. 후속으로 하후유·비요도 파견되었지만, 장기는 그들의 도착도 기다리지 않고 진군하여, 금성에서 황하를 건너, 반란군의 뒤를 찔러 무위에 도착했다. 그러나, 무위에서 비요와만 합류한 장기의 군대는 피폐해 있었고, 또한 병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현미에서 반란군과의 결전에 임했다. 참군 성공영을 사용하여, 반란군을 함정에 빠뜨려 복병을 사용했기 때문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공적으로 서향후에 봉해지고, 2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이전과 합하여 4백 호가 되었다.
그 후, 주천의 소형(蘇衡)이 강족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장기는 하후유와 함께 이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또한, 서광의 곡광(麴光)도 강족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켜, 군 태수를 살해했지만, 장기가 포고를 내고 내분을 유도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곡광은 동료에게 살해되었다.
2. 1. 후한 말기 관중 평정에 기여
202년, 원소가 죽은 후, 원상은 조조의 공격에 맞서 여양(黎陽)을 굳게 지키는 한편, 하동태수(河東太守) 곽원, 병주자사(幷州刺史) 고간, 남흉노의 선우(單于)인 호주천에게 평양(平陽) 공격을 명하고 관중(關中) 지방 군벌들과 연합하려 했다. 이에 장기는 사례교위(司隷校尉) 종요의 명으로 관중의 유력자인 마등을 설득했고, 마등은 아들 마초와 방덕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조조를 돕게 했다. 종요는 파견된 원군으로 곽원을 죽였고, 호주천을 조조군에 항복시켰다.[1]건안 7년(202년), 원상은 조조의 침공에 여양에서 저항하는 한편, 곽원과 고간 그리고 흉노를 사용하여 평양을 공격하게 하고, 더욱이 관중의 장군들에게 사자를 보내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장기는 조조에 의해 사례교위로 파견된 종요의 명령으로, 관중의 유력자들인 마등 등의 설득에 나섰다. 마등은 설득에 응하여, 아들 마초에게 1만 명 정도의 병사를 이끌게 하여, 조조에게 원군으로 보냈다. 종요는 그 병력을 사용하여 곽원을 참수하고, 고간과 흉노를 항복시킬 수 있었다.[1]
2. 2. 옹주와 양주 자사로 활약
202년, 원소가 죽은 후, 원상은 조조의 공격에 맞서 곽원, 고간, 호주천에게 평양(平陽)을 공격하게 하고, 관중(關中) 지방 군벌들과 연합하려 하였다. 장기는 종요의 명으로 마등을 설득, 마초와 방덕이 1만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돕게 하였다. 종요는 이 원군으로 곽원을 죽이고 호주천을 항복시켰다.[1]206년, 고간이 반기를 들고 위고와 내통하자, 조조는 장기를 의랑(議郞)으로 임명, 종요와 함께 공격하게 하였다. 장기는 마등을 다시 합류시켜 위고를 무찌르고 고간을 형주(荊州)로 달아나게 했다. 이 공으로 무시정후(武始亭侯)에 봉해졌다.[1]
211년, 마초와 관중 군벌들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자, 장기는 조조의 명으로 화음(華陰)에서 마초를 무찌르고 관우(關右)를 평정, 경조윤(京兆尹)으로 승진했다. 유민들을 불러 모아 현(縣)과 읍(邑)을 정비했다.[1]
이후 상서(尙書) ·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역임했고, 양주(涼州)에서 이건기첩과 치원다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주자사(涼州刺史)가 되어 이들을 토벌하고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1]
2. 3. 죽음과 평가
張旣|장기중국어는 용모와 동작이 뛰어났으며 글쓰기를 잘했다.[1] 군(郡)의 공조였던 유은(游殷)은 어린 장기를 방관의 그릇이라고 평가하고 집에 초청하여 빈객으로 대우했으며, 연회가 끝나면 아들 유초(游楚)의 장래를 부탁하기도 했다.장기는 옹주와 양주를 십수 년 동안 잘 다스려 그 통치에 대한 평판이 매우 좋았다. 이전 상사였던 서영과는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지만, 이전의 원한을 버리고 교제를 가지려 노력했기 때문에, 고귀한 신분이 된 장기에게 겸손하지 않았던 서영과 함께 그 태도를 칭찬받았다. 과거 유은의 아들 유초를 발탁하여 한흥 태수로 삼았다. 유초는 후에 농서 태수가 되었고, 제갈량의 북벌에 서역의 군 태수 중에서 유일하게 저항했다.
장기는 방연, 호준, 양부, 방육, 장공, 주생열 등을 추천했다. 관구흥(관구검의 아버지)의 공적을 평가한 적도 있다.
황초 4년(223년)에 사망했다. 뒤는 아들 장집이 이었다. 또한, 아들 장옹귀는 관내후에 봉해졌다. 조예 시대에 숙후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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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및 기타
장기는 용모와 동작이 뛰어났으며 글쓰기를 잘했다.[1] 군(郡)의 공조였던 유은(游殷)은 어린 장기를 방관의 그릇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집에 초청하여 빈객으로 대우하고, 연석이 끝나면 아들 유초(游楚)의 장래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장기는 군의 고관을 역임했고, 효렴으로 추천되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사공이었던 조조에게 초청받았지만, 부임하기 전에 무재가 되어 신풍 현령에 임명되었다. 그의 치적은 삼보에서 제일이었다고 한다.
장기는 옹주와 양주를 십수 년 동안 잘 다스렸기 때문에, 그의 통치에 대한 평판은 매우 좋았다. 이전의 상사였던 서영과는 사이좋게 지낼 수 없었지만, 장기는 이전의 원한을 버리고 교제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고귀한 신분이 된 장기에게 겸손하지 않았던 서영과 함께, 그 태도를 칭찬받았다고 한다.[1]
장기는 과거 유은의 아들인 유초를 발탁하여 한흥 태수로 삼았다. 유초는 후에 농서 태수가 되었고, 제갈량의 북벌에 서역의 군 태수 중에서 유일하게 저항했다.[1]
또한 장기는 방연, 호준, 양부, 방육, 장공, 주생열 등을 추천했다. 관구흥(관구검의 아버지)의 공적을 평가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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